유곡리와 두락리고분군에는 봉토분 40기가 조성되어 있고, 고분군 주변에는 1936년에 수해로 인근의 하천변에서 이전해 온 주민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 1970년대에 고고학 지표조사를 통해 그 존재가 확인되었으며, 2000년대에 발굴조사를 통해 가야의 고분군임이밝혀졌다. 가야의 서쪽 영역을 알려주는 중요성이 인정되어 2018년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2020년부터 수목정비 등 고분군 보존 정비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이 운봉고원의 가야 정치체는 백제와의 교역을 통해 성장한 정치체로서 유곡리와두락리고분군은 5세기 후반 가야연맹의 서북부 내륙지역으로의 지리적 확대 범위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유적이다. 유곡리와 두락리고분군에는 5세기 전반부터 6세기 전반에 걸쳐 석곽묘, 석실묘가축조되었다. 봉토가 큰 고분은 구릉지의 정상부나 능선을 따라 조성되고, 봉토가 작은 고분은 봉토가 큰 고분의 주변이나 구릉지 사면부에 축조된다. 석실묘는 6세기 전반에 구릉지 남측 사면부에 조성되었다. 가야 멸망과 함께 고분의 축조가 중단되었다.
고분군은 서쪽 평지에서 잘 보이는 구릉지에 입지하며, 구릉지의 능선에는 대형 고분이, 사면에는 중소형 고분이 군집하여 조성되어 있다. 5세기 후반에 조성된 32호분에서는주곽과부곽이나란히 배치되는데, 피장자가 묻힌 주곽에는 피장자의 권력을 상징하는 위세품, 무기류, 소량의 토기가 부장되며, 부곽에는대형의 토기가 다량으로 부장되는 차이가 있다.
가야식 석곽묘에 부장된 토기는 고배·기대·장경호로 구성되며, 토기의 세부양식에 대가야의 영향이 일부 반영되어 나타나 대가야와의 관계성을 보여준다. 한편 고분에서 출토된 중국계 청동거울과 백제계 금동신발, 목걸이, 유리구슬은백제 왕릉의 부장품과 매우 흡사하여 가야가 백제와 자율적으로 교섭했던 모습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