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고분군을 세계유산으로
가야고분군 고령 지산동 고분군

고령 지산동 고분군

고령 지산동고분군은 고령군 대가야읍 지산리 산 8번지 일원에 위치하며 약 814,816㎡ 규모의 넓은 구역에 700여기 이상의 봉토분이 분포하는 고분군이다. 1910년 일제 강점기 이후 16차례에 걸쳐 조사가 진행되어 중·대형 봉토분 15기와 석곽묘 수백기가 조사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권 29 고령현 고적조에 ‘현의 서쪽 2리 남짓 되는 곳에 옛 무덤이 있는데, 세간에서 錦林王陵이라 일컫는다’라고 함으로서 대가야왕릉으로서의 지산동고분군이 기록되어 있다. 

고령지역은 경상남도와 경상북도의 경계에 위치하여 동-서로 신라와 백제를  연결하는 육로와 가야의 남북을 연결하는 수로의 중심지에 위치한다. 대가야는 고령을 거점으로 성장하여 황강수계, 남강 중상류역, 남해안 일대, 섬진강수계, 금강 상류역에 걸친 넓은 권역을 형성하여 가야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이는 대가야양식 토기와 대가야계 묘제의 분포를 통해 증명된다. 일본 열도에서 출토된 대가야계 이식, 장식대도와 지산동고분군에서 출토된 왜경(倭鏡), 오키나와산 야광패로 만든 국자, 은장 철모 등으로 볼 때 대가야와 일본의 교류가 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일본의 고분, 초기 말사육과 관련된 유적에서 대가야계 장식 마구가 출토되어 일본의 기마문화 성립에 대가야가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대가야는 중국, 백제 등 주변국과의 교류를 통해 국가체계를 완성하고 국제적으로 입지를 다지기 위해 노력하였다. 가야에 대한 기록은 아주 단편적으로 남아 있다. 중국의 사서인『남제서』에는 479년 가라국왕 하지가 중국 남제에 독자적으로 사신을 파견해 보국장군 본국왕의 칭호를 수여 받은 기록이 있다.『삼국사기』에는 가실왕이 중국 당의 악기를 본 따 가야금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대가야의 중국, 백제와의 교류를 보여주는 고고학적 증거로 중국으로 가는 항로상에 위치한 부안 죽막동 제사유적에서 출토된 대가야계 마구와 지산동고분군 남쪽에 고아동 벽화고분에 축조된 백제계 횡혈식석실묘가 있다.

지산동고분군은 5~6세기대 대표적인 대가야 고분군으로 중심 묘제는 주·부곽과 순장곽으로 이루어진 다곽식의 수혈식석곽묘이다. 5세기 전반 73호분을 시작으로 주산에서 뻗어 내린 주능선의 돌출된 부분에 대형분이 축조되었다. 5세기 후반이 되면 1~5호분이 구릉 북쪽의 주산을 향해 열을 지어 조성되는데 이는 왕묘가 독립된 묘역을 차지하면서 중소형분과 분리되어 가는 양상을 보여준다. 이와 함께 구릉 남쪽에도 봉분이 있는 고분의 축조가 시작되는데 북쪽 구릉에 위치한 고분의 규모에는 미치지 못하여 북쪽 구릉에 조성된 고분군이 상대적으로 높은 위계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6세기 중엽 지산동 구릉 남동쪽에 백제의 영향을 받은 석실이 축조되기 시작하고 이후 대형분의 조영이 중단된다. 봉분의 배치상태를 보면 봉분의 규모가 클수록 구릉 상부의 탁월한 위치에 입지하고 있어 신분에 따른 입지의 차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산동고분군에서 조사된 봉분이 있는 고분의 수는 700여 기에 달하며 봉분이 유실된 것과 주변에 위치한 소형석곽묘를 포함하면 고분군 내에 만 여기에 달하는 압도적인 수의 고분이 분포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