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고분군을 세계유산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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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산성지서 출토된 목간, 부산 고대사 복원 ‘국보급’ 유물”
작성자 : 관리자(chogooh@korea.kr) 작성일 : 2018-07-13 조회수 : 2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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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톡·톡] “배산성지서 출토된 목간, 부산 고대사 복원 ‘국보급’ 유물”

부산박물관 40주년 심포지엄…지역 고대사 쟁점 3가지 토론

  • 국제신문
  • 박정민 기자 link@kookje.co.kr
  •  |  입력 : 2018-07-12 19:07:05
- ① 지역 최초의 목간 발굴
- 군 창고 물품관리 장부 가능성

- ② 부산, 최대 532년까지 ‘가야’
- 연산동고분, 가야고분으로 봐야

- ③ 삼한시대 독로국은 동래
- 지명유래·유적 미뤄 거제도 아냐

부산박물관 개관 40주년 학술 심포지엄(국제신문 지난 10일 자 22면 보도)은 많은 청중이 참가한 가운데 발표자의 설득력 있는 주장과 토론자의 날카로운 반박이 4시간 동안 오갔다. 지난 11일 오후 부산 남구 부산박물관 대강당에서 열린 이 학술행사는 ‘부산의 정체성과 역사 쟁점’이라는 큰 주제 안에서 부산 고대사 쟁점 3가지를 짚었다.
   
지난 11일 부산박물관에서 열린 개관 40주년 학술심포지엄 ‘부산의 정체성과 역사 쟁점’.
가장 ‘따끈따끈한’ 주제는 이용현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가 발표한 ‘배산성지 출토 목간과 신라 사회’였다. 부산박물관은 지난해 연제구 배산성지 문화재 발굴조사 중 1호 집수지(集水址)에서 묵서명 목간(木簡·글을 적은 나뭇조각) 1점을 발굴했고, 2호 집수지에서 목간 1점을 추가로 발굴했다. 부산에서 발굴된 최초의 목간으로 배산성지 일대에 있던 신라 거칠산군의 실체 규명 등, 사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부산 고대사를 복원하는 데 열쇠가 될 유물로 주목받았다.

심포지엄에서 이 학예연구사는 잔존 면적이 비교적 넓고(길이 29㎝, 너비 6㎝) 글자가 30여 자나 남은 2호 목간의 해독·해석에 집중했다. 이 학예연구사는 2호 목간이 “7세기께(675년±60년) 거칠산군이 관할하는 대판○촌에 관한 배산성지 주변 소재 군(郡) 창고의 물품(곡물) 관리 장부일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2호 목간에는 ‘大阪○村(대판○촌)’ ‘失受(실수)’ ‘今知(금지)’ ‘乙亥年(을해년)’ ‘二月 一日(2월 1일)’ ‘三斗(3말)’ ‘四月 一日(4월 1일)’ ‘一石四斗(1섬4말)’‘上法(상법)’ ‘村主(촌주)’ 등 글자가 있다. 이 학예연구사는 “‘을해년’으로 추정되는 글자가 있어 목간이 만들어진 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 함께 출토된 유구의 연대로 미뤄 을해년인 675년이 가장 유력하고 615년이나 735년 가능성도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이날 발표·토론자들은 배산성지 목간이 아직 연구 초기 단계로 전문가들의 다양한 견해를 종합해야 정확한 해석이 도출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학예연구사는 “부산지역에서 펼쳐진 신라 역사를 알 수 있는 자료가 많지 않아 배산성지 묵서는 ‘국보급’이라 할 수 있다. 부산박물관 40년 역사에 획을 긋는 중요한 발굴”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부산대 김두철(고고학과) 교수는 ‘부산은 언제까지 가야였는가’ 발표에서 “부산은 고대 국가 성립 단계부터 연산동고분군 고총고분이 소멸할 때까지 시종 가야였다. 부산은 지정학적으로 바다를 끼고 있어 가야사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3세기 말에서 562년까지 전기 가야의 중핵을 이룬 집단은 김해 대성동고분군 조영 집단과 부산 복천동고분군 조영 집단”이라는 것이다. 그동안 역사 기록이 없어 전기 가야의 중핵이던 부산의 위치가 간과됐다는 해석이다.

또 김 교수는 사적 제539호 연산동고분군에서 고총고분(봉분이 높은 무덤)이 더는 축조되지 않는 시점까지 “부산은 가야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토론자 경북대 이성주(고고인류학과) 교수는 “5~6세기 복천동·연산동고분군을 가야적인 고분군이라 정의하는 것에는 이의가 없지만, 가야고분으로 단정하는 것은 동의하기 어렵다”고 반박했다.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에 조성된 연산동고분군은 가야와 신라의 고분 축조 특징을 모두 지녀 이 지역이 당시 가야 영토였는지 신라 영토였는지 단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날 김 교수는 토기 문화, 마구와 갑주 분포 등을 종합해 “연산동고분군은 가야고분”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부산에서 가야의 끝, 곧 고총고분의 소멸은 가야와 신라의 결혼 동맹이 깨진 시점(529년)에서 금관국이 신라에 항복한 시점(532년) 사이”라고 덧붙였다.

부경대 선석열(사학과) 교수는 ‘삼한시대 독로국, 동래인가 거제인가’에서 “독로국은 부산(동래)에 위치했다”고 결론 냈다. 선 교수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독로국은 왜와 경계를 접한다’고 기록됐는데, 독로국이 거제도에 있었는가 부산에 있었는가를 두고 위치 비정 논란이 지속됐다”며 “동래라는 지명의 유래를 독로국에서 찾을 수 있고, 삼한 및 삼국시대 유적이 부산에 풍부한 점으로 볼 때 독로국을 거제도로 비정할 만한 근거가 희박하다”고 덧붙였다.

박정민 기자 link@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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